'명품'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돌아가신 부모님이 굉장히 아끼던 머플러가 있다면, 그러한 것이 명품입니다."
이 한 문장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흘러간 시간들, 사랑, 존경, 추억, 애뜻함..
명품이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청소년들을 원조교제로 몰고가고..
멀쩡한 사람들을 신용불량자로 몰고가는 것이 아닌..
보고만 있어도 그 사람과의 추억이 떠오르고
때론 흐믓한 미소를
때론 볼살이 뜨거워 지는 눈물을
따스한 커피 한잔에
하루 정도 그 추억이 잠길 수 있는..
여러분은 이런 '명품'을 가지고 계신가요?
혹시 보기에 예쁜것, 구하기 어려운 것,
나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명품'을 찾아 다녔던건 아닌지..
명품에 대한 정의
명품이란 사물 자체가 자기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가치이자, 실질적인 사용가치를 웃도는 아우라(Aura)를 지닌 물건을 일컫는다. 진정한 명품은 오래 숙성된 브랜드의 이념 속에서 세대를 뛰어 넘는 자신만의 향기와 가치를 일관되게 갖는 것이며, 단지 값이 비싼 제품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대물림 할 수 있는 '질'을 담보하는 것이다. 즉, 남이 따를 수 없는 기술과 기획력으로 전통과 함께 불멸의 가치를 지니는 것, 희소성의 논리가 정당하게 대접받는 것, 쓰면 쓸수록 빛을 발하는, 그리고 무엇보다 쓰는 이가 만든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때만 그 진가를 발휘하는 하나의 예술품, 그것이 바로 명품이다.
루이비통
모조품을 가장 잘 만드는 나라는 이탈리아와 홍콩
루이비통은 프랑스 본사서 제품을 생산, 전제품이 다 수작업으로 완성 -> 출고량이 많지 않음
프랑스 현지에선 아시아인들에 대해선 하루판매량을 정함 -> 지갑2개 가방1개 등
유럽이나 북미에선 진품을 우리나라처럼 흔히 볼수 있지 않음, 상류층만 소유
중하층은 명품을 과소비로 생각
루이비통의 전체 판매량의 70%가 일본에서 소비
반면 본토인 프랑스에선 가게가 문을 닫을 정도로 판매부진
프랑스에 루이비통 대리점이 몇개 없습니다.
루이비통 싸이트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가 따로있을 정도로 아시아권에 집중
명품의 특별함은 소수이어서 가능햇던 것.
그런데 오늘날 다수로 변해서 '어 흔한건데' 가 되어버림
까르띠에
나의 친구 마리옹 할머니는 친정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까르띠에 시계를 자신의 목숨처럼 애지중지한다. 이름이 좋아 까르띠에지 사실 그 시계는 보기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손때가 묻은, 둔탁한 모양의 구식 남자 시계다. 하지만 할머니에게 이 시계는 친정아버지의 애틋한 부정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인 동시에,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고이 간직한 애장품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시계가 그만 멈추고 말았다. 할머니는 급히 까르띠에 본사 애프터서비스 센터를 찾았고, 이 시계를 본 까르띠에 본사에서는 그곳의 지배인까지 나와 할머니에게 정중히 감사 인사를 올렸다고 한다. “이렇게 오래 저희 제품을 애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수리비 한푼 받지 않고 마리옹 할머니의 시계를 고쳐주었다. 이 사건은 ‘명품’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어주었다.
티파니(Tiffany)-미국
티파니사는 1837년 25세의 찰스 루이스 티파니가 친구 영과 함께 뉴욕에 문방구와
도자기를 취급하는 작은 가계를 내면서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시대를 앞서가는 디자인 아이디어는 티파니를 점차 보석점으로 변신시켜
나갔으며, 1845년엔 처음으로 거래에서 주문방식을 채택, 보석점 뿐만아니라 일반
소매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미국최고의 보석점 티파니는 시대적 추세를 타고 눈부시게 발전 1850년에는 파리에
1968년에는 런던에 지점을 설치 세계적인 회사로 발돋움 하게 되었다.
까르띠에(Cartier)-프랑스
유럽의 품위와 럭셔리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프랑스 브랜드.
1847년 보서계에 첫발을 내디딘 루이 프랑스와는 당시 상류계층에서 크게 유행하던 에나멜과 조금에 보석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1853년 보석 살롬을 열명서 때마침 일어난 보석 붐을 타고 왕실의 보석상으로 상류층의 사랑을 받으면서 차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완전함을 추구하는 까르띠에의 제품은 보석류,라이터,가죽제품,시계,필기구,식기류등 에까지 이르고 있다. 유행을따르지 않고 유행을 창조한다는 자세를 가진 까르띠에는 세련되 미와 꿈을 앞으로도 우리에게 제공해 줄 것이다.
다미아니(Damiani)-이탈리아
정교한 세공과 우아한 디자인으로 사랑 받는 정통 이탈리아 브랜드.
보석품의 중심지로 이름높은 이탈리아 북부 도시 발렌시아에 본거지를 두고 1958년에 창설 되었다. 긴 역사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보석계에 비해 비교적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다미아니는 이미 세계적인 보석 메이크로 성장했다. 현재 이탈리아에만도 전국에 1천여개에 이르는 판매망을 갖고 있으며 전세계로도 다미아니가 가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처럼 다미아니가 세계적인 메이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확고한 기술과, 완고하기 까지한 장인기질,새로운 감각과 독창성 때문이다. 다미아니 제품은 요란스러울 만큼 화려한 것은 거의 없고 피부에 어울리는 수수한 아름다움을 갖춘 제품이 많다.
쇼멧(Chaumet)-프랑스
화려하고 사랑스러운 디자인을 선보이는 파리의 유서 깊은 보석 브랜드.
22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 최고의 자존심 쇼메가 오늘날 세계 최고의 쥬얼리 하우스로 인정받게 된 것은 프랑스 역사의 가장 찬란한 시기였던 나폴레옹 시대에 나폴레옹 황제와 그의왕비 조세핑을 위한 결혼 예물을 제작하게 됨으로 유명해졌다.
청년 나폴레옹이 군인 장교였던 시절 추운 겨울날 배고픔과 추위에 지쳐 보석 상인 마리 에티엔트 니토(쇼멧의 창시자)의 가게 앞에 쓰러졌다. 그를 발견한 니토는 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따뜻이 보살펴 주어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고, 나폴레옹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후에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그때의 일을 잊지 않고 그를 불러 황제 대관식에 필요한 모든 장신구를 제작하게 하였으며 이것이 오늘도 파리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쇼메'의 비하인드 스토리다시대의 패션을 리드하면서도 언제나 유럽왕실 전통의 기품을 살려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어 낸다. 동시대적이면서도 시간을 초월하며, 프랑스라는 확실한 아이덴티를 내포,세계 어느곳에서도 존중받는 콜렉션이다.
스와롭스키(Swarovski)-오스트리아
18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스와롭스키는 100여년이 넘도록 스와롭스키만의 독창적인 기술과 끊임없는 연구개발로 세계 제일의 권위를 유지하며 세계 각 국에 크리스탈 스톤을 공급해 왔을 뿐만 아니라,20년 전부터는 'The Mouse'를 시작으로 실버 크리스탈이 사랑받으면서 Crystal Memory, Selection, Swarovski Jewelry Collection등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을 넓혀 왔다.
블가리(Bvlgari)-이탈리아
100년 이상의 전통에 현대적 감각을 절묘하게 섞은 이탈리아 컨템포러리 보석 브랜드 그리스 태생인 Sotirio Bulgari(창업자)가 그리스의 고적학전인 미를 이탈리아의 우아함에 매치시켜 유명해진 브랜드.
피아제(Piaget)-스위스
신기술과 디자인 개발로 세련되고 차별화된 컬렉션을 선보이는 브랜드.(스위스의 대표적인 고급 시계 메이커)
피아제 제품중 가장 유명한 상품은 286개의 다이아몬드(87.87캐럿)를 박아 세계에서 제일 비싼 (당시 우리돈으로 100억원가량) 손목시계가 된 휘버스가 있다. 피아제가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초현실주의 거장 달 리가 만든 피아제-달리의 인형이란 황금 작품때문이다. 이것은 달리가 피아제를 위해 손수 고안한 황금 장신구로 세계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피아제의 진기는 금이나 다이아본드와 같은 값비싼 재료로 자유분방하게 창작하며 끝없이 미를 추구하는데 있다.
피아제의 제품은 그 하나 하나가 예술품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특히 그 끝 마무리가 뛰어나다. 피아제의 진지한 자세와 우수한 기술은 다이아몬드 국제 대상, 유럽 메리큐르등 여러콘테스트를 휩쓴것만 보아도 입증된다.피아제는 이제 스위스 세계 명성을 지켜나갈 뿐만 아니라, 세계 보석계에서도 큰 발자국을 남기려는 새로운 의욕을 보이고 있다.
아가타(Agatha)-프랑스
귀여운 강아지 로고로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한 브랜드. 고전적 프랑스 문화의 예술품에 현대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감각이 더해진 고급스럽고 실용적인 디자인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방 클리프 & 아페르 (Van cleef & Arpels)-프랑스
세계적인 보석상이 나란히 들어선 유명한 파리의 방돔광장. 그 가운데 하나인 방 클리프 & 아페르가 개점한것은 1906년의 일이었다.그 당시 플랑스는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의 예술운동이 한창 이었으며 새로운 개성시대에 어울릴 새로운 패션을 요구 하고 있었다. 벨 에포크를 특징짔던 아르누보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장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 새로운 풍조를 반영하여 개최된 1925년의 '아르데코 전'에서 방클리프&아페르는 장미꽃을 모티브로 한 디자인으로 대상을 받음으로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방클리프는 전세계 왕실과 재계의 거물들을 매료시키는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해 나갔다. 그 중에서도 팔레비 왕비의 왕관은 방클리프 기술의 절정을 이룬 작품이다.
'미스테링 세팅(손톱을 사용하지 않고 보석을 세팅)'으로 불리는 방클리프의 획기적인 기술은 예술원 회원이 지니는 국보급 검을 제작하는 영예를 얻기도 하였다. 방클리프는 보석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엄격하고 정확한 식별안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창조력이다.
다사끼 지니아(Tasaki-Zinnia)
독특한 컬러와 아이템으로 개성이 강한 현대인의 의식에 부합되는 쥬얼리
1954년 설립된 기업으로 국내에는 1993년 런칭되어 하이 쿼럴리티를 보장하는 종합쥬얼리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다사끼 지니아의 최고 자랑은 디자인개발 능력이며 자신만의 독특한 쥬얼리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고객들을 위하여 10여 명의 디자이너들이 하루 평균 10-15점을 제품화 시킨다. 또한 아무리 인기 있는 상품도 꼭 최소한의 수량만 생산, 그 희소성을 더하고 있다.
투스아모르
결혼 예물 전문 브랜드로 차별화된 쥬얼리를 소유하고픈 사람들을 위해 소수의 수량만을 만든다
우노아레
독특한 소재 개발과 세공법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브랜드. 이탈리아 예물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팬디
피혁제품을 다루고 있던 아드레 카사그란디(adele casagrande)는 1918년 로마중심가의 Via del Plebiscito에 작은 가죽과 모피 가게를 설립한 것이 펜디(Fendi) 브랜드의 시작이다. 아드레 카사그란디(adele casagrande)는 1925년도에 에도알도 펜디(edoardo fendi)와 결혼 을 한 후 상호를 펜디로 변경하여 지금까지 사용해 오고 있다. 'FENDI'의 상점은 나날이 번창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되었고 점차 고급 제품으로 인식이 되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되었다. 사업이 날로 번창하게되자 그둘 사이의 다섯 명의 딸인 paola, Anna, franca, carla, alda가 그들 부모님의 사업을 계승하게 되었다.
디자인은 1962년이래 칼 라가필드가 담당하고 1969년 모피 프레타 포르테 개시와 동시에 가방, 가죽제품등의 취급하기 시작하며, 1997년에는 '바케트'가 폭발적 히트상품이되지만, 가족의 불화로 경영이 악화되었다. 2000년부터는 경영권을 프라다 그룹과 LVMH의 합병회 사 LVP에 위탁하고 있다.
이태리 남녀 토탈 패션브랜드 'FENDI'는 로고 이니셜인 `F'를 이용한 독특한 디자인으로 철저한 브랜드 이미지를 상품화 하는데 성공하여 전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중 적인 명품중에 하나이다. Dobble `F'이니셜이 돋보이는 쥬카(ZUCCA)라인과 천 재질로 만들어진 페퀸(PEQUIN)라인, 세련된 블랙으로 모던함을 강조하는 오토만(OTTOMAN)라인의 가방 및 소품들 100여 점을 다양하게 선보인다. 또한 모던하면서도 명품의 품위를 잃지 않도록 유지해온 디자 인 컨셉은 폭넓은 고객층을 확보할 수 있는 뛰어난 패션 마케팅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FENDI'는 대중들의 모피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귀하면서 딱딱하고 무거운 의류를 가볍고 부드럽고 입기에 편하게 만들었다. 비싸고 뻣뻣하고 무거운 의류를 밝고 가볍고 입기 쉽게 바꾼 것이다. 가죽을 그슬리고 염색하고 처리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으며 전에는 사용해본 일이 없는 가죽들을 패셔너블한 의류로 가공했다. 가죽제품에 대한 새로운 재 발견을 하게 했고, 새로운 제작기술을 시험하게 하였다. 가죽 이기기 제작법이나 안료를 쓰는 방법들이 시도되었고, 가죽이 제단되어 망사와 같이 만들어지거나 무늬를 새겨넣기도 하였다.
아름다운 모피제품은 합리적인 비용과 소비자가가 매겨졌고, 또한 'FENDI'는 그의 쁘레따 뽀르떼 모피들을 프랑스의 Pallazzo ditti에게 가져갔다. 그곳에서는 외국 바이어들이 공식적으로 뉴 라인을 소개하였고,'FENDI'는 외국으로부터 받은 아이디어나 제안들을 소화하면서 새로운 외국시장 개척에 고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으로 인해 FENDI는 미국 시장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가죽제품과 모피는 융화되어 졌으며,1977년 두번째 열리는 쁘레따 뽀르떼 컬렉션은 모피나 악세서리에서 나타나는 스타일이나 멋을 찾는 여성들에게 극찬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성공은 점차적으로 그들의 모피, 가방, 코트, 드레스에서 각각의 독특한 모양과 제작 기술을 나타내게 되었다.
1966년에는 Lagerfeld의 디자인으로 첫번째 모피 컬렉션을 가졌다. 이는 외국바이어들 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가져왔는데 블루밍데일의 대표인 Marvin Traub은 'FENDI'의 가죽 제품을 발견하고 이를 미국에 소개하였다. 이후에 FENDI의 여러 상점들이 생겨났으며,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뉴욕 5번가의 대형'FENDI' 부티끄가 생겼다.
1969년에 Florence에서 첫번째 기성복 모피 컬렉션을 가졌는데 여기서 끊임없는 개발로 품질의 저하 없이 낮은 가격의 환상적인 디자인의 모피를 선보였다. 이때까지 모피 안에 입을 옷들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만의 기성복라인을 탄생시켰고 이 또한 큰 성공 을 거두었다. 그후 오래지 않아 더욱 젊은 'FENDI'인 "Young"이 탄생하였으며 기타 향수나 라이센스등이 뒤를 따랐다.
주카(Zucca)
'FENDI'의 메인 테마.
모피코트의 내피에 사용되던 로고 패턴을 백의 외피에 사용한것이 그 시작.
이니셜인 F 를 두개 조합한 로고, '더블 F'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페라가모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는 나폴리 근교 작은 마을 보니토에서 1898년 태어났다. 그가 구두를 처음으로 만든 계기는 여동생에게 구두를 직접 제작해 주면서 비롯됐다. 그의 나이 겨우 아홉 살 때 일어난 일이다. 나폴리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은 그가 단순한 구두 직공이 아닌 열정을 지닌 구두 예술가로의 자질을 부여해 주었다. 보니토의 한 작은 구두 점의 견습공으로 들어가 이미 열한 살 때는 나폴리의 구두점 수련공으로 구두의 제작공정을 습득했다. 1911년, 열세 살이라는 나이에 여성 전용 맞춤 구두점을 오픈하였다.
"구두방에 없는 구두"로 승부를 걸었던 어린 'Ferragamo'의 '전략'은 마을 여성들에게 놀라운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1914년 이탈리아는 참으로 가난했다. 'Ferragamo'는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암울한 이탈리아를 떠나 돈을 많이 벌어 유명해져 고향으로 돌아오는 꿈을 안고 그로부터 2년 후인 열 여섯 살 되던 해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 서부의 산타 바바라에 정착한 그는 형제들과 함께 영화 스튜디오(아메리칸 필름 컴퍼니) 옆에 작은 구두 가게를 열었다. 그의 구두는 당대 스타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었으며, 아메리칸 필름 컴퍼니의 성공과 더불어 그의 구두 사업도 날로 번성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메리칸 드림도 1929년에 닥친 경제 대공황을 피할 수는 없었다. 'Ferragamo'는 고국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와 플로렌스(피렌체)에 정착한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후 그는 지속적인 성공을 위해 계속 노력했으며 1940년 그의 고향 보니토의 시장이자 의사의 딸인 완다와 결혼하였다. 'Ferragamo'가 생전에 창작한 구두 디자인은 1만 종류 이상이며, 코르크 통굽과 웨지 솔 등을 발명하였다. 2차 세계대전 후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새로운 신발을 연일 내놓았으며, 당시 국제적인 상류사회의 구두 디자이너로 인정받았다. 또한 끊임없이 새매장을 오픈하였으며 이와 관련된 무수한 상을 수상했다. 1947년에는 패션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니만 마커스'상을 수상함으로써 그의 창조성을 인정받았다.
헐리우드가 없었다면 페라가모의 성공이 다소 어려웠거나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최고의 품질과 남다른 패션 감각으로 그의 구두 사업은 산업 혁명을 통해 부를 쌓아온 미국 상류층의 욕구에 부합되어 날로 번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할리우드 영화 소품으로 쓰일 수제화에 주력하면서 당대의 여배우인 오드리 헵번, 그레타 가르보, 소피아 로렌, 진 할로우, 로렌 바콜, 애바 가드너 등을 사로 잡았다. 당대의 배우들과 함께 그가 창조해낸 스타일의 구두는 시대의 유행을 창조와 함께 페라가모 신화를 이루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영화 <칠년만의 외출>에서 지하철 통풍구 위에서 치맛자락을 날린 마릴린 먼로의 섹시한 구두 역시 페라가모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페라가모는 단순히 멋진 디자인의 구두만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성공적인 사업 비밀은 '착용감 좋은 구두'였다. 페라가모 신발은 발바닥에 장심을 부착해 발바닥의 느낌을 좋게 하고 발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공간을 제공하므로 뛰어난 착용감을 준다. 또한 페라가모 특유의 기술로 보행시 발이 앞으로 밀리는 현상을 방지한다. 그는 이러한 편안한 구두를 위해 UCLA대학에서 해부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공부하면서 발과 신발의 역학관계를 풀어냈으며 이러한 점을 반영하여 과학적인 신발을 만드는데 주력하였다.
뛰어난 디자인의 고급 구두를 만들기 위해 독창적인 디자인과 전 생산 과정 자체를 수작업화시키는 등 페라가모는 엄격한 품질 관리로 명성을 쌓아갔다. 그가 처음 시작했던 공장도 기계 사용없이 최고의 숙련공의 기술로 가동되었다. 현재는 1백 34가지 신발 제조 공정 중 중요한 몇몇 단계는 아직도 수작업을 고수하고 있다. 단 신발의 뒷마무리는 기계 바느질에 의존하는데 이는 손보다 기계 바느질이 빠르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전문 기술자와 기계를 적절히 활용한 생산 방식은 페라가모의 생산량을 지속적으로 늘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페라가모는 1년에 1천 8백만 켤레를 생산하며 대부분이 여성용 구두이다.
오븐이 단지 과자와 케이크를 굽기 위해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페라가모 구두의 마지막 비밀 하나는 모든 공정을 마친 구두를 7일간에 걸쳐 굽는 것. 오븐에 있는 시간에 따라 구두 모양이 더욱 견고하게 보존되어 시간이 흘러도 그 모양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고의 소재만 선별하여 사용함은 물론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페라가모의 구두는 세계 최고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바라(Vara)
낮은 굽의 막힌 구두로 그러스그레인 리본과 금장식으로 여성들을 사로잡은 페라가모를 대표하는 구두. 1978년에 발표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선보이고 있으며 소녀에서 중년 부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령층의 여성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너무 스포티하지도 지나치게 우아하지도 않은 스타일의 '바라'는 다양한 색상과 아이디어로 제작되며 최근에는 니켈 장식과 에나멜 소재로 제안되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간치니
salvatore ferragamo 구두, 가방의 메인 테마. 이탈리아어로 '고리'란 뜻으로,가방의 잠금쇠로 쓰인 것이 시작되었다. 이것을 단추로 사용한 옷도 있다.
불가리와 웅가로
페라가모는 단지 페라가모 외에도 관련 기타 패션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1996년 7월 샤벨로부터 웅가로 향수 사업권을 획득하였으며, 1997년 3월에는 세계적인 보석 업체인 불가리의 향수, 화장품에 대한 합작 계약을 맺었다.
프라다
1913년에 마리오 프라다와 그의 피혁제품의 import shop을 오픈, 1978년에 마리오의 손녀딸인 미우쳐 프라다가 3번째 대표주주가 되어, 가방 종류 뿐 아니라 슈즈, 의류 분야에도 진출하고, 1995년에는 맨스콜렉션을 발표하게 되었다. 1996년에는 prada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역삼각형의 로고 플렛이 달린 나일론 가방을 대히트 시키고, 1999년 이후에는 질 샌더를 인수하게 되었다.
현재 prada 그룹은 거대한 브랜드 제국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있다. 20세기 초 새로움에 대한 강한 지적 호기심과 열정, 독창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마리오 프라다는 젊은 시절부터 세계 각국을 누비고 다녔다. 여행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와 경험을 넓힌 마리오 프라다는 유럽과 미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탈리아 밀라노에 최고품질의 가죽제품 전문매장을 오픈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prada 신화를 만들어낸 진원지이다.
최고의 기술과 정성,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prada의 가죽 전문 매장 두 곳을 밀라노에 열게 된다. 그때 오픈한 매장 중 그 유명한 갤러리아 아케이트에 위치한 매장은 현재까지도 계속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무엇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특별한 분위기가 우러나는 prada 패션이 지닌 최고의 강점은 미세한 색상 배합, 섬세한 소재, 그리고 엄격한 퀄리티 콘트롤이다. prada의 옷은 "아름답게 소박하고, 소박하게 아름답다" 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prada를 대표하는 그녀의 세계이다.
연약함과 성적 매력대신 자신감을 내보일수있는 옷을 찾는 여성들을 위한 옷이며, 여성의 아름다움이 상품화되지않으면서 여성스럽게 보일수있는 옷이다.
미우치프라다 그는 할아버지가 트렁크를 감싸 보호하는데 썼던 포코노 나일론으로 1978년 그 유명한 TOTE 를 내놓았다. 당시만해도 가방의 소재로는 가죽이 일반적으로 쓰여졌다. 그러나 미우치아는 틀을 깨고 고급스러움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던 나일론 소재로 만든 지퍼 백을 선보였다. 형태는 고전적이었던 이 가방은 나일론 소재로 제작되어 현대적인 멋과 장인 정신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제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튀는 멋도 없는 너무나 심플해서 단조롭기까지 한 디자인 탓에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확신이 뚜렷하면 끝까지 추진해 나가는 사람이 바로 미우치아다.
그녀는 뜻을 굽힐 줄 모른 채 불확실한 제품을 계속 생산한 탓에 시즌이나 스타일에 관계없이 애용할 수 있는 이상적 소재로 1978년부터 패션세계에 각광받게 되었다. 현재는 대표적인 상품으로 인식되지만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시도가 아닐수 없었다. 1990년대 들어 차츰 차츰 이 나일론 백의 보유자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유행과 더불어 패션도 바뀌었다. 울이나 면, 린넨 등과 같은 천연적인 소재 사용에서 벗어나 각종 합성 소재를 이용한 패션의 등장은 prada의 나일론 가방 판매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그만큼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온 나일론 가방은 현대적인 멋이 어떤 것이냐는 물음표에 시원스런 답을 안겨준 `모더니티의 명품`이된 셈이다.
현대적인 우아함과 견고함, 특히 행동파 여성들이 좋아하는 나일론가방이 바로 문제의 충격적 시도한 결과, 실용적이면서도 스포티한 스타일에서부터 우아한 이브닝 스타일의 의상까지 모두 커버 할 수 있는 다기능적이고도 정교한 디자인의 포코노 소재 핸드백과 액세서리가 완성되게 되었다. prada 실루엣은 특별히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거기에는 prada 특유의 '친숙함'이 있다. 이것이 prada의 성공비결이다.
토드
Tod's의 역사는 1917년, Diego Della Valle의 조부인 Filippo Della Valle가 작은 제화점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Filippo의 아들인 Dorino에 이르러 Tod's는 점점 번창하기 시작하였으며, 손자인 Diego Della Valle가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Tod's는 비로소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Tod's는 최상의 품질을 지닌 Urban-chic의 심볼이 되었고, 탁월한 디자인과 실용성으로 Tod's는 전세계 유명인사들의 애용하는 필수 소장품이 되었다. 이러한 Tod's만의 높은 퀄리티는 가방에서도 대단한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손으로 제작된 모든 가방은 Tod's 만의 독창성과 현대적 감각, 그리고 실용성이 어우러져 모든 여성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명품과 실용성의 Miky bag은 Tod's의 새로운 성공작이다.
그 독특한 개성과 섬세한 제작기술로 이 시대 여성들에게 최고의 명품 아이템으로 인식되고 있다. 일상에서나, 직장에서, 그리고 여행할 때에도 언제나 완벽하게 보이고 싶어하는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제품이 Tod's의 Miky Bag이다. Tod's를 아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소장해야 할 아이템 중 하나이다.
토드 디백 (Tod's D-bag)
D-bag은 현대적인 미, 그리고 실용성을 추구하는 여성들에게 단연 최고의 아이템이다.
Tod's가 2년여에 걸친 실험과 테스트를 통하여 실용성과 멋의 완벽한 배합으로 세상에 선보인 이 가방은 여성들이 집 밖에서 필요한 모든 필수소품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크기가 특징이다.섬세한 수공기술과 최상의 품질의 가죽을 이용하여 제작된 D-bag은 명품의 가치와 실용성이 완벽한 비율로 조합이되어 유행을 타지않는 최고의 명품 아이템이 탄생된 것이다.
토드 슈즈 (Tod's Shoes)
미끄럼을 방지하는 고무로 만든 독특한 pebble sole(자갈무늬 밑창)을 심볼로 내세운 Tod's의 신발은 세계 최고의 명품이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사라면 누구나 한 켤레이상은 Tod's의 신발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세계의 영화배우들과 유명인사들의 두터운 매니아층을 자랑한다. 시간과 계절에 관계없이 언제나 우아하고 심플함이 돋보이며, 정장이나 캐쥬얼 어느 쪽과도 코디가 가능한 진정한 퀄트상품이다.
베르사체
'Gianni Versace'는 1946년 이탈리아 남부 카리브리에서 태어난 그는 건축을 전공 했지만 이탈리아 인기브랜드에 디자인을 제공하는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했다.
26살에 밀라노에 디자이너로 입성한 'Gianni Versace'는 1978년데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로 독특한 패션세계를 구축, 첫 컬렉션을 가짐으로서 독립된 'Gianni Versace'라인을 열었게 되었다. 그 후 81년에 'Gianni Versace'를 설립과 이탈리아의 맥니베르사체를 설립하고, 이탈리아의 최고의 디자이너로 그의 실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인기와 명성을 얻게 되었다.
'Gianni Versace'의 심볼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양의 신 '메두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머리카락이 뱀으로 되어있고 보는 이들을 돌로 만드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가 로고인 것처럼 오리지널 리티가 넘치는 철저한 화려함과 특유의 패널 무늬, 자수 고채도, 원색의 화려한 컬러 프린트가 특징으로 꼽힌다.
패션가 사람들은 'Gianni Versace'라하면 조각을 연상케 하는 드라마틱한 분위기와 이를 통해 신체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고 삶에 대한 정열을 심어준 디자이너로 기억하고 있다. 그가 만들어낸 의상은 "입는 사람의 도전을 기다리는 감각적인 옷" 또는 "바로크시대 의 예술가적 신화를 만들어가는 독특함이 있는 옷" 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입는 사람의 도전을 기다리는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
이런 'Gianni Versace'의 의상들은 과감하게 신체부위를 노출시킨 디자인이면서 하늘하늘한 실루엣을 특징으로 하고 있어 매년 세계 패션계의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또한 약간의 독기와 과장성, 스릴을 느낄 정도의 '사치스러움'이 지속되어 있고 컬트적 성격이 있어 소비자 연령층이 오히려 넓어지는 장점을 지니고 있는 'Gianni Versace'는 특히 계층분류에 의한 집중적 고객 확보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타겟에 따른 명확한 방향 설정으로 꾸뛰르 지향의 오리지널리티를 고수하고 있고, 이에 따라 경쟁력과 부가가치를 상승시키고 있다.
정확한 고객 타겟층 분석에 바탕을 둔 다양한 서브 브랜드를 창출함으로써 항상 톱브랜드의 중심의 되었으며, 'Versace' 왕국은'Gianni Versace'와 모두 8개의 서브 브랜드로 구성되어 있다. 유럽 귀족과 같은 최상류층을 겨냥한 오뜨꾸뛰르 라인 아틀리에 'Gianni Versace'가 상위 브랜드이다.
에트로
1968년 원단사업으로 시작한 짐모 에트로(gimmo etro)는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의 고유명사로 적용한뒤 자신만의 스타일(LIFE STYLE TOTAL LOOK) 'ETRO' 라는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독창적인 색상인 페이즐리 문양이 강조되었고, 곧 그 문양이 그 회사의 TRADE MARK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ETRO고유의 페이즐리 문양을 다양화한 디자인과 칼라로 현대감각에 맞게 표현하여 많은 이들로 하여금 사랑 받고 있다.
백 라인의 주류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어 이불, 담요, 소파등 집안을 우아하게 장식할수는 홈 컬렉션을 시작하였고, 1990년대에는 의류사업 육성을 위해 디자이너들은 고품질의 수공작업으로 전통적인 프린트를 살리면서 창조적이면서 현대적인 컬렉션을 창조해냈다.
잡화에서 시작된 'ETRO'는 숄, 스카프, 타이등의 라인은 독특한 재질 뿐 만아니라 정교한 디자인과 색감으로 의류사업과 함께 다시 한 번 강조되었다.
상업적인 면으로 'ETRO'는 지난 10년 동안 아시아 전지역에 강한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 'ETRO'는 70%이상을 수출에 의존하는 편이다.
본사는 이태리 밀라노의 역사적 지역인 "VIA SPARTACO"에 쇼룸과 함께 자리잡고 있으며, 앞으로의 계획은 이태리 국내시장을 지속적으로 발전 시켜감으로서 국제시장의 시장점유율을 높이는데 주력하고 있다.
1996년부터 뉴욕으로부터 시작된 세계화로 1997년 런던, 1998년 베를린, 1998년에는 중국시장으로의 진출하고, 한국시장은 1993년 신라면세점으로부터 시작으로 지금까지 면세점, 백화점, 명품관 등에서 ETRO의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
제냐
창업주 'ermenegildo zegna'는 1892년 이탈리아 북부 산간 지방인 트리베로에서 출생하여, 20세 때 아버지가 경영하던 소형 공장을 물려받아 'ermenegildo zegna'기업을 탄생시켰다.
1966년 'ermenegildo zegna'가 세상을 떠난 뒤 'zegna'기업은 그의 아들인 알도 제냐(aldo zegna)가, 다시 손자인 안젤로 제냐(anjelro zegna)로 이어졌다. 현재는 질도 제냐(jido zegna)와 파울로 제냐(paolo zegna), 안나 제냐(anna zegna), 라 우라 제냐(laura zegna), 베네데타 제냐(benededa zegna)등 제냐가의 4세대들에 의해 경영되고 있다.
'ermenegildo zegna'는 1910년 비엘라알프스의 작은 지역인 트리베로에서 'ermenegildo zegna'에 의해 창립되었다. 'ermenegildo zegna'는 그의 아버지의 원단 사업을 시작으로 남성복을 위한 최고 품질의 원단을 생산하기 위해 기술개발은 물론이고, 직원들의 훈련과 브랜드 프로모션 등을 통해 최상의 상품을 탄생시켰다.
살토리얼 라인은 전통적 품위가 느껴지는 정장 라인으로 다양한 도시적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셔츠와 타이를 포함한 모든 컬렉션을 유지하고 확대 강화한다. 이 라인에 주로 사용되는 원단은 매우 극히 소량만 생산되는 최상의 섬세한 울로 계절의 구분 없이 입을 수 있는 특성을 지녔다.
특히 'ermenegildo zegna'는 고객의 체형에 맞도록 기성복을 보완해 만드는 반 맞춤복 시스템인 '수 미주라'를 특징으로 하는데, 이는 이탈리아어로 '당신의 사이즈에 맞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기성복을 보완해 만드는 반 맞춤복 시스템을 가리킨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치수와 체형에 맞게 커팅된 원단으로 호주 산 메리노 울, 내몽고 산 캐시미어, 중국산 실크 원사 등을 사용해 최상의 퀄리티를 창조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품질 검사는 손으로 직접하며 레이저 기술을 사용하여 직물의 흠집을 찾아낸다. 이 흠집의 수공, 역시 손으로 직접 하며, 가장 놀라운 점은 남부 이탈리아에서 야생하는 티슬(teasels:토끼풀의 일종)을 사용하여 캐시미어를 더욱 부드럽게 하기 위한 기모가공을 모두 수공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옷 안쪽에는 Taglio Exclusive라는 문구를 새기며, 원하면 착용자의 이름을 새길 수도 있다.
창업자인 ermenegildo zegna의 이름을 딴 이탈리아 남성복 'ermenegildo zegna'의 반 맞춤복 라인인 '수 미주라'는 최상의 제품들을 만들고자 하는 장인정신을 반영한다. ermenegildo zegna는 자신의 사업을 통해 그의 원단 생산지였던 산악 지대를 개조하는 그의 꿈을 실현했다.
양복 한벌에 200 ~ 300만원대의 전 세계 최고급 남성복 브랜드 시장의 30%를 점유하면서 전체 매출의80%이상을 수출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4000여명의 직원을 두고있다.
셀린느
어린이의 구두에서부터 시작된 세계 유명브랜드인 'CELINE'은 작은 상점에서 일약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1946년 파리의 작은 부띠끄로 시작하여 1959년 신발 앞쪽에 금속장식이 있는 여성용 잉카 로퍼를 제작하게되어 명성을 얻는것을 시작으로 고객층을 어린이 에서 성인으로 넓히게 되었다.
이후, 포니백으로 그명성을 더해가자 'CELINE'은 의류 사업까지 영역을 확장하게 되었으며, 1969년 첫의류 콜렉션을 출시하게 되면서 그명성을 프랑스 전역으로 확대해 나가게 되었다. 1975년 세계시장으로 진출을 위해 세계 쇼핑의 중심가에 매장을 오픈한 당시의 성공은 'CELINE'의 모조 상품들이 극성을 부리고 이에 대한 방지책으로 모조상품 대책위원회를 설립한 역사가 대변하여 준다.
특히 아시아 시징에서의 성공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1984년까지 28개의 매장이 일본에서 오픈하고 동남아시아까지 시장을 확대하였으며 그 결과로 1985년에는 아시아 지역의 매출이 'CELINE'의 전세계 매출의 60%를 차지할 정도였다. 'CELINE' 로고의 탄생은 'CELINE'이 전세계적으로 매장을 확장할 때 선두에 서서 얼굴 역할을 해온 로고는 'CELINE'의 탄생보다 조금 더 뒤의 일이다.
착실하게 프랑스의 명품브랜드로서의 발자국을 내디뎌온 'CELINE'은 1971년에 파리 개선문 안의 장식 문에서 영감을 얻고 여기에 'CELINE'의 앞글자인 C를 결합시켜 체인 모양의 'CELINE'의 로고 'C-Blason'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로고는 가죽 제품과 신발에 사용되어왔으며 최근에는 로고 프린트의 열풍으로 루이비통(louis vuitton)이나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 샤넬(chanel)등과 함께 명품브랜드를 대표하는 로고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처음에 'CELINE'에서 볼수 있었던 로고는'C-Blason'을 연결시킨 모양이었지만, 최근에는 라틴어 C와'C-Blason'을 혼합한 형태의 로고와 'CELINE'이라는 브랜드네임까지 다양하게 만나볼수있다.
'CELINE'은 198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디자이너의 영입으로 과거의 이미지와의 탈피를 시도하게 된다. 사실 프랑스의 명품하우스 이미지의 'CELINE'을 뉴욕 근교의 롱아일랜드 출신으로 FIT에서 공부를 한 미국적인 감성을 지닌 마이클 코스가 맡는다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이 인상좋은 디자이너는 외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카리스마로 'CELINE'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변화시켰다. 그는 미국적인 실용주의를 스포티한 감각과 고급스러움으로 포장하는 그만의 스타일로 파리의 명품 하우스 'CELINE'에 젊은 활기를 불어넣었고, 동시에 그 자신도 1998년 6월에 뉴욕 7번가의 동료들이 수여하는 올해의 디자이너'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글래머러스하면서도 편안한 것, 매니시한 동시에 페미닌한 것, 스포티하면서도 럭셔리한 것, 이것이 바로 마이클 코스가 이끄는 'CELINE'의 패션이다.
샤넬
'Chanel'이라는 브랜드의 탄생은 가브리엘 코코샤넬(gabrielle "coco" chanel)이 1941년 파리에 모자 가게를 오픈으로 시작이되었다. 1916년 오토크? 콜렉션을 발표후 당시 상복에만 사용되던 검은색을 사용해 화제가 되었으며, 또한 'CC'의 로고 마크와 '샤넬 슈츠' 는 꽤 유명해 졌다.
Chanel 자신도 사교계에 몸을 담고 화려한 생활로 행동 반경을 넓혀 갔으며, 현 디자이너 칼라가 필트는 1983년부터 'Chanel'에 근무하게 되었다. 뒤로 묶은 은발의 헤어스타일, 검은 선그라스, 그리고 동양적 스타일인 부채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기본적으로 여성을 주 타겟으로 하고 있으며 'Chanel'은 시대를 앞서가는 대담성과 정확한 판단력으로 현대적 의복의 창조와 여성의 개성을 강조하였다. 그녀는 당시의 관습을 타파하고 자유와 활동성을 추구하는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들어냈다.
의복의 역사에 혁신을 일으킨 샤넬은 또한 액세서리와 보석을 디자인하여 패셔너블한 여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는데 미국의 보그지는 'Chanel'이 의상에서 액세서리까지 총 망라한 이 모든 작업을 "토탈룩"이라고 표현했다. 이 때부터 토탈 패션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으며, 'Chanel' 은 'Chanel'의 상징이기도 한 금 체인의 누빈 핸드백, 검정 토우베이지샌달, 다리를 더욱 더 날씬하게 보이게 하는 'Chanel' 라인의 창조 등을 통한 토탈 룩을 실현해냈다.
'Chanel'의 토탈룩은 무엇보다 여성을 위한 실용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이 깃들어 있다. 즉, 여성의 손을 해방시키기 위해 금 체인이 달린 핸드백을 창조해 냈고, 다리를 더 길어 보이게 하기 위해 베이지색을 이용한 슈즈를 고안해냈으며, 포켓은 손을 넣기 위해서 실용성을 바탕으로 디자인되었다.
'Chanel'의 창조정신은 지난 1983년부터 'Chanel'의 패션 디자인을 맡은 칼 라거펠트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그녀는'Chanel'의 근본 스타일을 잊지않고 보다 창의적이고, 미래적인 디자인을 선보여 브랜드의 명성에 걸맞는 독창성과 고급스러움을 만들어내어 'Chanel'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다.
오늘날 'Chanel'은 파리 패션의 자존심으로 오뜨 꾸뛰르의 주역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전 세계의 많은 여성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는 브랜드가 되었다.
샤넬 백 (Chanel Bag)
1955년에 등장한 'Chanel' 의 메인가방. 덮개 잠금쇠 부분에 코코 마크가 특징이다.
1929년이후 가브리엘 코코 샤넬 (gabrielle "coco" Chanel) 자신이 계속해서 사용해왔던 백이 제품화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코코 마크 (Coco Mark)
'Chanel'의 심벌 마크.
창시자 가브리엘 코코 샤넬(gabrielle "coco" Chanel)의 이니셜을 겹쳐서 만든 것이다.
버버리
패션 명품 'burberry'의 창시자인 토마스 버버리(Thomasr burberry)는 원래 포목상으로 당시 농부나 목동들이 즐겨 입었던 스목-프록이라는 옷감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소재 개발과 연구를 거듭하여 '개버딘'이라는 혁신적인 원단을 개발했다. 이 소재는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며, 입고 난 후 세탁이 수월하고 비교적 습기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에, 비가 자주 오고 축축한 영국 기후에 적합한 레인코트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처럼 우수한 품질과 실용성 덕분에 개버딘 버버리는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에 의해 많은 사랑을 받으며 명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화려하면서도 고전적인 'Burberry'는 가장 영국적인 브랜드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며 눈에 띄는 성장을 보여왔다. 영국여왕으로부터 여섯 번에 걸쳐서 수출상을 수상하는 등 영국의 타의류 회사와는 필적할수 없는 성과를 거두면서 세계적으로 고품질의 전통적인 의류로 명성을 얻고 있다.
국왕이 코마스 버버리의 개버딘 코트를 입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내 버버리를 가져오게" 라고 말한 것이 널리 퍼져, 버버리가 곧 트랜치코트를 지칭하는 패션용어가 되어 버렸다.
많은 스포츠 광들과 탐험가들에 의해 사랑을 받으며 남극 탐험가 아문젠과 최초의 대서양 횡단자 알콕경과 같은 모험가들의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 하며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burberry' 남성의류 컬렉션은 클래식한 버버리에 스포티하지만 세련된 느낌의 새로운 라인을 더한다. fabric은 부드럽고 유연하며 풍부하다. 가죽제품과 shearling이 선보이며, 은은하고 연한 체크가 돋보이는 washed fabric과 overdyed fabric,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새로운 스트레치이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또한 Prorsum collection에서 영향을 받은 지퍼와 포켓의 디테일링은 클래식한 'burberry'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는다.
루이뷔통
현재 프레타 포르테 라인을 담당하는 마크 제이콥은 1963년 뉴욕 출신이며, 파슨즈 재학 중부터 디자인을 시작하여 1987년에는 최연소로 '페리 엘리스' 상을 수상한 천재이며,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거점을 두고 있다.
연한 참나무 빛깔의 가구와 베이지의 카펫,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조명은 한눈에 150년 전통으로 귀족풍을 대표하는 'Luis Vuitton' 매장임을 알게 해준다. 멋을 아는 이들 가운데 진한 고동색 배경에 반복되는 꽃과 별무늬, 그리고 `LV자'가 겹쳐진 'Luis Vuitton' 모노캔버스 가방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가장 프랑스적이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명품으로 통하는 'Luis Vuitton', 150여년 역사가 만들어낸 철저한 귀족성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1854년 오페라하우스가 있는 파리중심가 루데브데 "까푸 신느"에 첫 매장을 열고 혁신적인 디자인의 여행용 트렁크를 내놓았다. 당시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이후로 모조품이 판을 치기 시작해 이를 막기위해 처음 고안한 것이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빨간줄과 격자무늬 문양이었다.
1854년 파리에 여행가방 전문점으로 오픈하여, '다미에', '모노그램', '에피', '타이거' 등 차례로 인기상품을 내놓았으며, 이런 노력은 2세인 조르쥬 비통이 1896년 부친의 이름 첫 글자인 'LV'와 당시 유행하던 아르누보 경향의 꽃과 별무늬를 결합해 모노그램 캔버스를 선보이면서 절정에 달한다.
1987년에는 모헤 헤네시사와 합병, 산하 브랜드로 크리스챤 디올, 지방시 등을 거느린 최고의 브랜드 제국이 되었다. 1996년에는 마크 제이콥스를 디자이너로 영입해 프레타 포르테에 진출하여 '모노그램 베르니'를 시작으로, 엘레강스한 컨셉에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으로 현재 가장 주목 받고 있는 브랜드 중 하나이다.
고가품, 전통적인 클래식에 디자인의 중점을 둔 전통을 자랑하는 품위와 명품의 상징 루이비통에 1997년 마크 제이콥스가 합류하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뉴욕 출신의 마크 제이콥스는 전통적인 루이비통을 젊고 신선하고 발랄한 브랜드로 거듭나게 한것이다.
과거 고가품이라는 브랜드 이미지에 중후하고 클래식한 디자인에만 촛점을 맞췄던 것에서 탈피하여 캐쥬얼 라인을 새롭게 선보이는 젊어진 루이비통의 변화에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것이다.
모노그램 캔버스 (Monogram Canvas)
브랜드 로고 등을 반복 패턴으로 짜나간 캔버스 원단을 말한다.
'luis vuitton'의 가방 등에 사용되는 원단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캔버스란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굵은 실을 빽빽하게 짜서 만든 원단을 가리킨다.
베르니 (Vernis)
전통적인 'Luis Vuitton'의 모노그램 패턴을 마치 진주를 생각나게 하듯이 컬러플한 소재에 새겨넣은 새로운 시리즈이다. 베르니는 '광택이 있는' 이란 뜻이다.
클러치 백 (Clutch bag)
어깨에 매기도 하고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백의 총칭한다.
까르띠에
"보석상의 왕, 왕의 보석상" - Cartier
1백 50여 년 역사를 통해 명품의 자리를 지켜 온 'cartier', 이를 흉내낸 가짜 상품들은 'cartier'의 정교하고 완벽한 기술까지 따라잡지는 못한다. 시계줄이나 부품, 가죽등 진짜 상품과는 어딘가 한 군데씩 다르게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1847년 아돌프 피카드(Adolphe Picard)의 견습생이었던 루이-프랑수아 까르띠에가 한 보석 작업장의 책임을 맡으면서 시작된'cartier'의 역사, 그때부터 1백 5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 찬사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루이 프랑소와 까르띠에는 여행,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독서를 통해 얻은 영감 등에서 상상력의 소재를 찾았다.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기록하기 위해 팬과 노트를 늘상 지니고 다녔으며 평범함에서 찾아낸 그의 번득이는 아이디어들은 노트와 스케치북에 기록되어 마침내 보석 영역을 예술장르로 승화시켰다.
왕가와 유명인사들에 의해 특별한 지지를 받고 분별력있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왕들의 보석가'인'cartier'는 현재 전 세계 180개 부티크, 1만 2,000여개 샵을 가진 거대한 전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전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cartier'는 일찍이 영국의 에드워드 7세로부터 '보석상중의 왕'이라는 칭소을 받을 정도로 보석상으로서의 명성을 높여 갔다.
파샤 C (Pasha C)
1985년에 출시한'cartier'의 인기 손목시계.
기능성이 뛰어난 스포츠 타입으로 크고 둥근 숫자판이 돋보이는 감각적 디자인으로 소매 없는 옷에 어울린다.
탱크 (Tank)
'cartier'사의 최고 인기모델 시계.
탱크라는 의미에서 알 수 있듯 견고함을 느낄 수 있다. 사각의 문자판이 특징이다.
구찌
1913년, 구찌오 구찌(guccio gucci)가 피렌체에 고급피혁 제품점을 오픈하면서 더블 G 마크가 붙은 캔버스와 빨간색과 그린색 조화의 워브라인등을 발표하면서 196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집요한 장인 정신, 일상을 넘어서는 획기적인 크리에이티브, 뛰어난 품질, 이 세가지는 명품이 지녀야할 필수 요소인 동시에'GUCCI'의 신화를 일으킨 원동력이기도 하다. 1953년 해외 매장의 성공적인 진입과 함께 'GUCCI'는 세계 유명 인사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 받으며 명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 'GUCCI'의 이름 뒤에는 1백년 전통이란 수식어와 명품 중의 명품이라는 찬사가 붙는데 'GUCCI'는 정통성을 기반으로 한 클래식한 패션, 디자이너 브랜드의 일관성과 현대적 패션과 조화를 통해 'GUCCI'만의 스타일을통해 'GUCCI'만의 스타일을 완성해 그 명성을 더해가고 있다.
구찌오 구찌(guccio gucci)는 "최상의 전통을 최상의 품질로, 그리고 과거의 뛰어난 제품을 현대에 반영시킨 상품만들기"를 컨셉으로 한다.
품질 보증을 하기 위해서 디자이너 이름을 넣어서 판매한 것이 브랜드 상품의 원조이다. 구찌오 구찌(guccio gucci)가 고안한 자신의 이니셜을 모태로 한 더블G 의 모노그램은 매우 유명하다. 밀라노의'GUCCI'는 지금도 세계 트랜드의 센터이지만 구찌사는 지금 구찌가의 손을 떠나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상태이다. 현재 구찌그룹 N.V.의 사장 겸 최고책임자는 'GUCCI' 재건의 입안자이기도한 도메니코 데 소레이다.
산로랑과 세루지오 로시를 매수하는등, 프라다(prada)의 패트릿시오 벨테리와 함께 패션업계를 독점한다는 착각이 드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남자이다.
'GUCCI'의 역사는 19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탈리아 중부 플로렌스에서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구찌오 구찌(guccio gucci)에 의해 창업 되었다.
처음에는 세련된 세공 기술과 최상의 재질로 승마에 필요한 가죽 제품을 선보여 귀족 사회에서 인기를 누렸고, 이후 자전거가 상류 사회에 보급되면서 핸드백과 같은 일반 가죽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혼란에 빠뜨린 2차 세계 대전에'GUCCI'는새로운 창조와 도약의 시기를 맞는다. 부족한 가죽 제품을 대신해 만든 캔버스천 가방이 역사적인 디자인으로 자리잡으며 'GUCCI'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것이다.
2000년 이후에는 수많은 브랜드를 흡수, 입생로랑(Yvessaint Laurent)등을 거느리게 됐다.
가방을 비롯해 신발, 의류, 시계와 안경 등의 각종 소품과 보석, 향수, 홈 켈렉션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장르의'GUCCI' 제품은 'GUCCI' 만의 오리지널 컨셉트 속에서 명품의 품위를 지켜 나가고 있다.
뿌리를 잃지 않는 정통성의 집념, 새로운 정통성에대한 집념, 새로운 것을 더욱 새롭게 하는 유연함, 최고로서의 책임감과 자존심은 'GUCCI'의 명성을 더욱 확고히 지키며, 세계 패션사에 아름다운 전통을 세우고 있다.
더블 G (Double G)
'GG 마크'라고도 한다.
창시자 구찌오 구찌(guccio gucci)의 이니셜을 배열한 'GUCCI'의 심볼마크로써 1940년대부터 사용된이 로고를 기하학적으로 짜넣은 캔버스를 사용한 제품이 'GUCCI'의 대표상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재키 백 (Jackey Bag)
미국 대통령 부인이고 1950, 1960년대의 패션 리더였던 재키 케네디가 애용했던 'GUCCI'의 메인 백이다. 클래식하고 모던한 실루엣이 특징이며,1999년 재 등장하고서 다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제품이다. 'J 백'이라고도 한다.
비트 모카싱 (bit moccasin) 발등 부분이 V자형 가죽조각으로 봉제 된 구두를 모카싱이라 한다. 여기에 호스비트(horse bit : 말의 재갈을 두개 이은 모양의 금속구)를 붙인 스피폰 슈즈, 대략'GUCCI'의 로퍼를 가르킨다고 해도 무방하다.
명품브랜드의 브랜드 관리 - 사례를 중심으로
오랜 역사와 나름의 철학, 그리고 독특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명품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고 있는 몇몇 브랜드의 사례를 통하여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주요 성장 코드들을 짚어 보자.
사례 1)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위해 사는 'PRADA'
앞서가지만 너무 진보적이지 않은, 패셔너블하지만 한 시즌의 유행에 머물지 않는, 친숙하지만 늘 새로운, 그것이 바로 프라다의 기본 컨셉이다. 프라다는 제품 하나 하나가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에 장인정신에서 우러나오는 엄격하고도 세심한 주의와 정성을 기울임으로써 하나의 예술품에 버금가는 완벽한 제품을 탄생시킨다. 전세계에 펼쳐져 있는 프라다 제품에 대한 이미지관리와 구입정책, 가격정책의 기본 전략은 모두 밀라노에 있는 본사에서 결정함으로써 전세계 고객들에게 프라다의 패션정신을 보다 일관되게 전달하고 있다. 또한 프라다는 인기 연예인들에게 자사 제품을 입히는 스타 마케팅 전략으로도 유명한 브랜드이다.
사례 2) 보석 세공 예술의 살아있는 전설 'CHAUMET'
세계 최고의 보석으로 인정받는 보석 쇼메의 현재 주 고객은 유럽 왕실을 비롯하여 일본 황실과 중동의 석유 재벌, 미국의 케네디家 등이다. 파리 방돔 광장에 자리잡고 있는 쇼메하우스 1층에는 예약에 의해서만 방문이 가능한 부띠끄가, 2층에는 쇼메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쇼메하우스의 중심인 안뜰에는 아뜨리에가 있다. 이곳에서는 하얀 가운을 입은 숙련된 장인들이 초창기부터 이어진 행동 규칙과 제작원리에 따라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사용하는 장비들은 3세기 이상 된 것들로 아뜨리에의 모든 기구들은 곧 역사적인 유물이며, 따라서 아뜨리에 자체는 2백 2십 년 동안 살아 숨쉬는 쥬얼리의 역사책이자,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쇼메의 전 과정들은 모두 장인들의 손으로 이루어져 제품에 더욱 큰 가치를 부여한다. 또한 모든 쇼메 보석에는 음각으로 새긴 작은 다이아몬드 모양의 각인(刻印)이 찍히며 그것이 바로 쇼메의 감정사 역할을 하게 된다.
사례 3) 장인 정신으로 빛나는 명품 'HERMES'
에르메스는 오늘날 국제적인 그룹의 규모를 자랑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손길이 살아 숨쉬는 회사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에르메스의 전 제품은 4~5백 여명의 장인들의 완전한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며, 각각의 모델에는 그것을 제작한 장인의 고유 번호가 찍히게 된다. 또 한편 에르메스에서는 문화예술지원 부서를 운영하고 있다. 이 부서에서는 갤러리 건립, 다양한 예술 지원활동, 문화행사 개최를 맡고 있는데 전세계의 그림, 조각, 무용 등 다방면에서 예술세계를 펼쳐나가는 작가들을 후원하고 있다. 이러한 에르메스의 메세나(Mecenat) 활동들은 자사의 모든 제품이 예술가적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따른 것이며 '예술가적 철학'으로 대변되는 에르메스의 기업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올해로 2회 째를 맞는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은 이러한 에르메스의 기업정신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앞서 보았듯이 명품브랜드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특징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긴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한결 같은 품질. 둘째, 철저한 장인정신. 셋째, 동시대적이면서도 새로움을 창조해 가는 끊임없는 제품 개발. 넷째, 일관된 브랜드 이미지 유지를 위해 가격 정책, 광고 전략, 매장 디스플레이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본사에서 관리하는 수직 통합 체제. 이러한 요소들이 모여 오늘날 고품질·고가치의 명품을 낳은 것이다. 그렇다면 명품 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한 그들만의 특별한 마케팅과 홍보기법은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보자.
1) 브랜드를 함부로 노출 시키지 않는다
명품 브랜드는 TV에서 광고를 하지 않는다. 한 예로 조르지오 아르마니(GEORGIO ARMANI)의 경우 소량의 카달로그를 서점에서만 판매한다.
2) Anti-status 심벌 전략
일반적으로 명품 브랜드들은 로고 문양을 찍는 디자인 자체가 유행일 때를 제외하고는 되도록 작게 박거나 안쪽으로 숨긴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로고문양 자체가 모든 아이템에 기본으로 들어가는 브랜드도 있다. 예를 들어 루이비통(Louis Vuitton)이나 샤넬(CHANEL) 등과 같은 브랜드들이다.
3) 스타마케팅 전략
명품 브랜드와 인기 연예인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스타들이 자사 제품을 착용함으로써 브랜드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면서도 마케팅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많이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대중 매체에서의 홍보를 통해 수요를 높이기보다는 고객층을 제한함으로써 브랜드 이미지와 가치를 지키겠다는 의도에서 스타 마케팅을 피하는 브랜드들도 있다.
4) 보수와 혁신의 적절한 조화
명품 브랜드는 저마다 역사에 남을 만한 제품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당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제품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가진 혁신과 조화되는 보수성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동일하게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5) 꾸준한 메세나(Mecenat:기업의 예술후원활동)와 자선활동
국제 시장을 기반으로 예술에 투자함으로써 기업 이미지를 고양하고 잠재적 고객을 개발하는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에르메스에서는 예술가를 후원하는 메세나 활동을, 루이비통에서는 에이즈퇴치기금 마련을, 그리고 페라가모에서는 불우어린이 기금 마련 등 사회 공헌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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